부산역에 내리자 염도가 높은 바람이 먼저 와 닿았다. 서울에서 들고 온 속도가 한 번에 느려지고, 고개를 들면 선로 끝에서부터 바다의 냄새가 밀려왔다. 가방을 작게 꾸려 온 건 잘한 일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어 놓고 남포동으로 내려가 골목의 리듬부터 익혔다. 상점 셔터에 붙은 오래된 스티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어묵 국물, 자갈치에서 흘러오는 목소리들. 도시가 들숨을 할 때마다 나 역시 천천히 호흡이 맞춰졌다.
첫 번째 만남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자리에서였다. 보수동 책방골목을 따라 오르다 작은 헌책방의 유리문에 손을 올렸는데, 문 안쪽에서 누군가 먼저 나왔다. 책 더미를 피하려다 서로의 어깨가 아주 가볍게 스쳤다. 짧은 사과, 그리고 짧은 정적. 낯익은 눈매와 미세하게 경사진 미간. 이름을 불렀다면 분명 여전히 그 이름으로 대답했을 사람.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랬다. 내 옆으로 먼저 지나간 건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뒤이어 나온 남자의 손이었다. 유리문이 다시 닫히며 달그락 소리를 냈고, 그 순간 바람이 골목 안쪽까지 밀려왔다. 나는 유리문에 잠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그녀는 아이의 모자를 바로 씌워 주었다. 우리 사이에는 인사 대신 바람과 유리 소리만이 남았다.
그날 오후, 영도대교를 건너 흰여울마을을 내려가면서 나는 계속 같은 생각을 했다. 도시가 넓은데도 같은 사람을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러다 마을 아래쪽 데크에서 다시 마주쳤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바다 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나는 데크 난간에 팔을 올린 채 파도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한 프레임이 찍히는 시간만큼,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고, 그녀는 안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안녕”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건 아마 내 기억이 만든 보정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사진은 몇 장 더 찍혔고, 아이는 카메라를 들고 까치발을 했다. 나는 데크를 내려와 골목으로 들어섰다.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골목 모퉁이를 도는 순간까지도 바다의 반짝임과 그녀의 옆모습이 겹쳐 있었다.
밤은 광안리에서 맞았다. 해가 기울며 다리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모래 위에는 자리 깔고 앉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고, 물가 가까이에서는 누군가 작은 불꽃을 터뜨렸다. 나는 편의점에서 산 맥주를 들고 방파제 가까운 곳에 앉았다.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이 그곳에서 있었다. 아이가 모래에 그려 둔 원을 따라 빙글빙글 돌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고, 그 아이를 일으켜 세워 준 사람이 내가 되어 버렸다. “괜찮아?” 하고 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그녀와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의 온도는 충분히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아이의 무릎에 묻은 모래를 손바닥으로 털어 주었다. 그리고 내 쪽을 향해 아주 얇은 미소를 보였다. 모른 척하기로 했지만, 그 미소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바다 위에서 바람이 방향을 바꿨고, 다리의 조명이 조금 더 진해졌다. 우리는 서로의 동선을 알고 있지 않았지만, 다음에 어디서 또 마주치게 될지 감각적으로 알 것 같았다.
이튿날 새벽, 해운대 동백섬 산책로. 여명과 새의 울음이 서로 엉겨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동백숲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발 아래 자갈들이 작은 소리를 냈다. 바다와 숲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시간, 등 뒤에서 아이가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그 아이였다. 잠에서 막 깬 듯한 눈, 손에는 작은 조개껍질 하나. 뒤이어 그녀가 나타났다. 우리 둘 사이로 바닷바람이 지나갔다. 그녀는 아이에게 조심히 걷자고 말한 뒤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 말들은 많았지만, 실제로 건넨 대화는 그보다 훨씬 적었다. 아이가 앞장서서 뛰어가고, 그녀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나는 한 박자 뒤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셋이 함께 걷는 모양새였지만, 실은 서로의 시간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애쓰는 세 사람이었다. 산책로 끝 벤치 앞에서 그녀는 멈춰 섰다. 아이의 신발 끈을 다시 묶어 주며 조용히 말했다. 잘 지냈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잘 지냈어. 그녀는 다시 웃었고, 그 웃음에 어릴 때와 다른 무언가가 겹쳐 있었다. 다정함과 단단함이 동시에 들어 있는 웃음. 나도 모르게 손에 쥔 캔커피가 조금 흔들렸다.
우리는 여전히 모른 척을 이어 갔다. 낮에는 수영만 요트경기장 쪽을 걷다가 장갑 모양의 구름을 발견했고, 청사포 다릿돌전망대에서 파도가 돌기둥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송정 쪽으로 넘어가는 버스를 탔을 때, 가장 뒤쪽 좌석에서 그녀 가족과 시야가 포개졌다. 아이는 창밖의 서퍼들을 가리키며 급하게 말을 쏟아냈고, 남자는 지도를 확인하며 내릴 정류장을 계산했다. 그녀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 창틀에 손을 포개어 올렸다. 그 손목의 얇은 핏줄까지, 나는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보았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누군가는 지금 이 상황을 영화 같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제의 감정은 영화보다 훨씬 조용하고 복잡했다. 박진감 대신 숨 고르기, 클라이맥스 대신 숨죽임. 서로가 서로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거리를 나는 마음속으로 여러 번 측정했다.
점심은 송정 해변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동백섬에서의 작은 대화를 반복 재생했다. 그 사이, 식당 문이 열리고 그녀 가족이 들어왔다. 부산은 갑자기 작은 마을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모른 체하며, 한 테이블 간격으로 앉았다. 뜨거운 국물이 식탁 가운데 놓이고, 아이가 숟가락을 떨어뜨려 바닥이 작은 소리를 냈다. 나는 물을 따르는 척하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봤다. 그녀는 아이에게 물티슈를 건네며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의 방향이 내 쪽인지, 아니면 모든 사람을 향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녀가 한 번 눈을 들었고, 나는 그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무릎 아래로 바다가 밀려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바다는 도시 안으로 깊게 들어와 있었고, 우리는 그 위를 걷는 사람들처럼 밥을 먹고 있었다.
오후엔 잠깐 흩어졌다가, 해가 기울 무렵 초량 이바구길의 벽화 계단에 섰다. 회색 도시가 주황빛을 입으면, 골목은 오래된 사진처럼 보인다. 계단 중간쯤에서 나는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멀리 바닷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위에서부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빨리. 뒤를 돌아보니 그녀와 남자가 아이와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계단의 서로 다른 구간에서 어색한 삼각형을 이루었다. 그 순간,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었다. 그녀의 앞머리가 이마로 붙었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 동작 하나에도 과거의 시간들이 겹쳐 보였다. 우리는 그저 자리만 비켜 주었다. 아무 말도,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선택한 가장 예의 있는 방식이라 믿었다.
밤이 되어 다시 광안리로 돌아왔을 때, 바다는 낮보다 더 차분했다. 다리 아래로 빛이 길게 늘어지고, 모래에는 낙서들이 겹겹이 새겨졌다 지워졌다. 나는 모래 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선은 금세 무너졌다. 그 무너짐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누군가 내 옆에 와 앉았다. 그녀였다. 가족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는 모래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모래가 손금 사이로 잔잔히 스며들었다. 우리 사이에 말이 하나쯤 필요할 것 같았지만, 막상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지내. 그 두 음절이 모래 위에 비밀처럼 내려앉았다. 나도 똑같이 대답했다. 응, 너도. 그 말들이 다였다. 우리가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많은 말이자, 가장 적은 말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나는 모래에 손바닥을 한 번 더 눌렀다. 손바닥의 온기가 아주 천천히 빠져나갔다. 그 빠져나감이 오래된 작별인사 같았다. 불꽃놀이가 조금 멀리서 터졌다.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번졌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첫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끝내 불러 보지 못한 이름들의 총합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시간이 흘러도 마음속에 밝고 작은 조각으로 남는다고. 하지만 오늘의 우리는 다른 어른들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그 사실이 서늘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마지막 날 아침, 부산역 대합실의 공기가 맑았다. 유리 천장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사각형의 블록을 만들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오갔다. 나는 커피를 들고 앉아 창밖의 선로를 바라봤다. 그때 반대편 에스컬레이터에서 그녀 가족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내 시야는 즉시 무수한 선택지로 갈라졌다. 손을 흔들 수도 있었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머리를 아주 조금 숙여 인사했다. 그녀도 똑같이 했다. 아이는 앞만 보고 뛰어갔고, 남자는 표를 확인했다. 그 장면은 너무도 평범했지만, 우리에게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 인사는 오래된 기억의 뒷면에 조용히 붙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도시의 지붕들이 뒤로 흘렀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의 소금기가 아직 목 뒤에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가방 속에서 부산 지도를 꺼냈다. 흰여울 데크, 동백섬 산책로, 청사포의 돌기둥, 송정의 모래, 이바구길 계단, 광안리의 밤. 볼펜으로 아주 작은 점들을 찍고, 그 점들을 얇은 선으로 이었다. 선은 모양 없이 휘어지고 겹쳤다. 그 선의 어디쯤엔가, 모른 척하며 지나간 순간들이 있었다. 서로를 배려한다는 이름으로 건너뛴 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빛에 붙어 남은 미세한 흔들림들. 이상하게도 그 공백들이 선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다. 여행은 때로 사진으로 남고, 때로는 빈칸으로 남는다. 나는 이번 여행을 빈칸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 빈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충분히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서울에 닿기 직전, 창밖으로 도시가 다시 속도를 올렸다. 그 속도에 맞춰 내 마음도 덜컹거리며 현실로 복귀했다. 그래도 여전히 어제의 바다가 등 뒤에서 나를 밀어 주는 것 같았다. 이틀 동안, 우리는 모른 척하는 법을 배웠다. 그건 비겁함이 아니라, 각자의 삶을 존중하기 위한 작은 지혜였다. 첫사랑은 다시 사랑이 되지 않았지만, 사랑이었던 시간을 더럽히지도 않았다. 바다는 늘 그랬듯 묵묵히 제 할 일을 하고, 도시는 아침을 열 준비를 했다. 나는 창문에 이마를 잠깐 댔다 떼었다. 유리의 차가움이 이마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 할 수 있는 인사 중 어떤 것은, 말보다도 훨씬 조용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차가 완전히 멈추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나는 가방을 메고 플랫폼으로 걸어 나왔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속에서는 한 번 더 바다가 반짝였다. 이틀 전 첫 만남의 유리문 소리, 흰여울의 바람, 광안리의 모래, 동백섬의 캔커피, 이바구길의 계단, 다시 광안리의 밤. 그리고 우리가 모른 척하며 나눴던 모든 인사들. 그 인사들 덕분에, 나는 나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번에 부산을 다시 걷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또다시 모른 척할 것이다. 그 모른 척 속에는 묵음 같은 안부가 들어 있다. 잘 지내. 응, 너도. 바람이 답할 것이다. 바다는 그 말을 오래동안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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