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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경주

by Toast 2025.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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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공기부터 달랐다. 서울에서 가져온 속도가 한 번에 줄어들고, 숨을 들이키면 흙냄새와 풀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경주는 오래된 도시지만 첫인상은 의외로 단정했다. 숙소에 가방을 맡기고 황리단길로 걸어 들어갔다. 한옥 지붕선들이 낮은 하늘을 받치고, 오래된 목재 냄새와 막 구운 빵 냄새가 교차했다. 카페 유리창에 비친 골목을 보다가 문득 이 거리의 이름이 왜 이렇게 익숙했나 떠올랐다. ‘황남동’과 서울의 ‘경리단길’에서 따왔다던 그 별칭. 바로 옆으로 대릉원첨성대가 이어지는 위치 덕분인지 사람의 흐름이 적당히 살아 있었다. 관광객처럼 보이는 연인들이 손을 꼭 잡고 지나가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었다. 시간의 오래됨을 ‘뉴트로’로 재구성한 거리, 경주의 현주소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동네 같았다.

 

점심으로는 따끈한 국수를 먹고 대릉원 돌담을 끼고 천천히 걸었다. 잔디에 번지는 초록은 한여름의 포화가 아니라 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의 여유였다. 해가 기울 무렵, 나는 월정교로 향했다. 논과 하천이 연달아 펼쳐지는 평지 속에 기둥을 단단히 박고 선 목교가 쨍하게 나타났다. 물이 잔잔한 날이면 다리의 기와와 누각이 강물 위에 또 하나의 도시처럼 비친다. 일몰 이후 불이 들어오자 교각 아래 금빛이 번지고, 다리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얇게 늘어졌다. 운영 시간표를 보니 교량은 밤 10시까지, 누각은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기에 천천히 시간을 늘려 보기로 했다. 어쩐지 여기서는 해가 더 천천히 지는 것 같았다.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치고 서 있었을 때였다. 옆에서 바람을 피해 모자를 눌러 쓰던 누군가가 내게 사진을 부탁했다. 폰을 돌려받을 때 손끝에 닿은 짧은 온기와 서로의 눈빛이 아주 잠깐, 한 컷처럼 맞물렸다가 지나갔다. 그녀는 혼자 여행 중이라 했고, 나는 내일 새벽 불국사에 갈 생각이라고 했다. 밤이 더 내려앉을수록 다리의 붉은 기둥이 물속 그림자까지 또렷하게 드러냈다. 우리 둘은 별다른 약속 없이 한동안 같은 풍경을 보았다. 말 대신 다리 아래로 흘러가던 물소리가 둘 사이를 채웠다. 

 

다음 행선지는 동궁월지였다. 표를 끊고 들어가면 물결 너머로 누각의 빛이 퍼지는데, 유리잔에 차곡차곡 물을 채우듯 고요가 깊어진다. 예전에는 ‘안압지’라고 불리던 곳, 통일신라의 별궁과 인공 연못 터라는 안내문을 읽으며 물가를 따라 걸었다. 밤이 되면 이곳의 풍경은 유난히 차분한데, 그 고요 속에서 사람들의 발소리마저 하나의 악센트가 된다. 물결의 검푸른 색 위에 금빛이 겹겹으로 놓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연꽃 잎사귀의 그림자가 파문처럼 번졌다. 나는 이 도시가 낮보다 밤에 더 자신감 있어 보인다고, 그녀는 여행자는 밤에 비로소 여행자가 된다고 말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황리단길의 상점들은 대부분 불을 끄고 있었다. 늦게까지 문을 연 작은 바에서 맥주 한 병을 나누고, 서로의 여행 노트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국립공원 스탬프를 모으는 중이라 했고, 나는 계절마다 같은 도시를 다시 걷는 게 취미라고 했다. 새벽에 향하는 동선이 비슷하니 내일 아침 불국사에서 만나자고, 그것만 약속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공기가 다르게 차가웠다. 불국사로 올라가는 버스에서 내리니 산자락이 안개에 반쯤 잠겨 있었다. 대웅전 앞마당의 돌길을 밟을 때마다 작은 파문처럼 소리가 번졌다. 쌍탑 사이에 서면 시대가 일순 겹친다.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품고, 청운교·백운교가 경내로 이어지는 우리 불교미술의 표본 같은 사찰이다. 이곳과 석굴암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른 아침의 고요한 빛 아래서 그 문장을 다시 떠올리자 의미가 새로웠다. 돌의 무게는 수백 년 전 그대로인데, 그 무게가 사람을 더 가볍게 만든다.

 

그녀는 약속대로 나타났다. 탑 그림자가 짧게 드리운 마당 한쪽에서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들고 서 있었다. 함께 천천히 돌계단을 올라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가, 산책로를 따라 석굴암 방향으로 차를 잡았다. 석굴암은 내부 관람 시간이 오전 9시부터라서 우리는 입구 숲길에서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냈다. 동해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토함산 능선을 넘어오고,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흩어졌다. 개방 시간이 되어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불상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마치 먼 시간 속 누군가와 시선을 맞춘 듯한 고요가 흘렀다. 어제 본 야경의 반짝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도심으로 내려오는 길, 우리는 다시 황리단길을 지나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은 한 손에 커피를, 다른 한 손에 지도를 들고 어디론가 향했다. 첨성대 쪽으로 걸어가니 들판은 이미 가을의 색이었다. 아이들은 잔디에 누워 하늘을 찍고, 어른들은 박물관의 표정을 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 전체가 야외 박물관 같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상업과 유적, 생활과 역사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가까스로 균형을 잡는 느낌. 우리는 느리게 걷는 법을 이틀 만에 다시 배웠다. 

 

헤어짐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는 다음 도시로 향하는 표를 확인했고, 나는 서울행 기차 시간을 살폈다. 대단한 약속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언젠가 봄 동백이 필 때 다시 경주에 오게 된다면, 월정교 난간 어딘가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막연하고도 단단한 확신 같은 것.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번거롭게 교환하지 않았다. 여행에서만 가능한, 그 애틋한 익명성에 신뢰를 조금 맡기기로 했다.

 

기차가 출발하고, 차창 너머로 들판과 낮은 지붕들이 뒤로 미끄러졌다. 이번 여정은 화려한 체크리스트보다 장면의 잔상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월정교의 수면 위에 겹겹이 깔리던 금빛, 동궁과 월지의 고요한 밤 공기, 불국사의 돌계단을 밟을 때 발바닥으로 전해지던 미세한 떨림, 석굴암 앞 숲길의 아침빛,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여행자의 웃음. 도시가 주는 건축적 완성도와 유산의 무게였다면, 여행이 더해 준 것은 사람의 온기였다. 경주는 낮과 밤, 고요와 환함, 역사와 일상의 리듬을 천천히 오가며 그 온기를 붙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돌아와 보니 가방 한쪽 주머니에서 월정교에서 받은 작은 안내 리플릿이 구겨진 채 나왔다. 거기엔 운영 시간이 적혀 있었고, 손톱만 한 종이에는 미처 적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었다. 다음번엔 봄비가 내리는 경주를 걷고 싶다. 물기를 머금은 지붕선과 젖은 흙냄새 속에서, 어쩌면 또다시 누군가와 같은 풍경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도 이 도시는, 지금처럼 우리를 아주 느리게 환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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