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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바르셀로나

by Toast 2025.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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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문이 열리자 바람이 달았다. 바다와 돌과 레몬 껍질을 섞어 놓은 듯한 향. 나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날, 도시가 나를 한입 베어 무는 느낌을 받았다. 숙소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라 람블라로 걸어 나갔다. 사람의 흐름이 강물처럼 좌우로 갈라지고, 거리 연주자의 기타가 햇빛을 길게 끌었다. 중앙쯤에서 시장 입구의 색이 갑자기 진해졌다. 보케리아 시장. 투명 컵에 담긴 패션프루트 주스를 들이켜니 혀끝이 바로 여행자의 속도로 맞춰졌다. 하몽의 기름, 올리브의 염도, 잘게 부서진 얼음의 소리—도시의 첫 인사는 늘 입안에서 시작된다는 걸 새삼 알았다.

 

시장 뒤편의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공기가 달라진다. 차양이 늘어진 창문, 세탁물이 흔들리는 발코니, 돌바닥의 반사광. 고딕 지구(바리 고틱)의 그림자는 척추를 따라 내려왔다. 나는 길 모퉁이의 작은 카페에 들어가 카운터에 팔을 올렸다. “우나 코르타도, 포르 파보르.” 바리스타가 고개를 들었다. 햇빛에 물든 눈동자, 약간 쉰 듯 낮은 목소리. “발음, 훌륭하네요.” 이름을 묻자 그는 “마르크(Marc)”라고 말했다. 잔을 내려놓는 그의 손목에 잔근육이 살짝 움직였고, 나는 뜨거운 잔을 잡으려다 순간적으로 그 손목과 닿을 뻔해 멈췄다. “이따가 엘 보른으로 산책 가요. 오후 빛이 제일 좋아요.” 그는 영수증 끝에 작은 화살표를 그려 건넸다. 화살표의 끝에는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이라고 적혀 있었다.

 

약속까지 시간이 남아 카사 바트요로 향했다. 유리 비늘이 파도를 흉내 내고, 발코니는 물고기의 뼈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해체된 직선들이 다시 도시의 곡선을 만들어냈다. 건너편 그늘에서 잠시 쉬다 그라시아 거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골목마다 작은 광장이 열리고, 아이들이 스쿠터를 타며 소리의 곡선을 그렸다. 도시가 사람을 쉬게 하는 방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늘, 벤치, 그리고 적당한 소음.

 

약속한 시간에 엘 보른에서 마르크를 다시 만났다. 그는 동네를 “항상 움직이는 오래된 책”이라 불렀다. 우리는 산타 마리아 델 마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열주가 위로 솟아 서로의 무게를 견디고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는 오후의 빛을 잘게 부숴 바닥에 뿌려 놓았다. “여기는 우리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곳이에요.” 그가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장소가 되는 방식은 그렇게 조용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약간 더웠다. 그는 작은 바에 데려가 버무트 한 잔을 건넸다. 허브 향이 올라오는 잔 사이로, 우리는 서로의 도시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은 밤이 길죠?” “여긴 저녁이 잘 익어요.” 말들이 잔의 벽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졌다.

 

해가 기울어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내려갔다. 모래는 낮 동안의 열을 아직 버리지 못했고, 파도는 여섯 번째 줄에서 얌전히 무너졌다. 마르크가 말했다. “겨울이면 이 물이 더 맑아져요.” 우리는 신발을 벗고 물가까지 걸어갔다. 발목을 스치는 물이 언어보다 먼저 가까워졌다. 그는 모래 위에 작게 선을 그었다. “여기까지 오늘.” 그 선은 파도 한 번에 지워졌다. 나는 장난삼아 한 걸음 더 들어가 손등으로 물을 튕겼다. 물방울이 그의 턱에 닿자, 그는 익살스럽게 미간을 좁히더니 내 손을 가볍게 쳤다. 손바닥끼리 닿는 그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둘째 날, 아침 일찍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갔다. 개장 직후의 내부는 여전히 고요했다. 기둥들은 숲처럼 서 있고, 천창에서 떨어진 빛이 유려한 곡선으로 내려앉았다. 색유리의 그라데이션이 바닥을 더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의 색이 바뀌었다. 나는 그 풍경을 길게 바라보다가 문득 전날의 바다가 떠올랐다. 서로 다른 리듬이 같은 몸에서 공존할 수 있음을, 이 도시가 가르쳐 주는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 성당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공사 소리가 낮게 울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위안이 됐다. 완성되지 않은 것들이 사람을 더 오래 걷게 한다.

 

성당에서 나와 산 파우 병원 쪽으로 잠깐 들렀다가, 다시 중심가로 내려와 마르크와 합류했다. 그는 스쿠터를 끌고 와 핸들을 내게 맡겼다. “운전은 내가, 방향은 네가.” 우리는 몬주익 언덕으로 향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항구의 그림은 거대한 미니어처 같았다. 컨테이너의 색, 크레인의 각도, 바람의 두께. 성곽 위 그늘에 앉아 우리는 반으로 가른 오렌지를 나눠 먹었다. 손가락에 남은 즙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닦아냈다. 나는 물티슈, 그는 바지에 쓱. “네 방식이 더 여행자 같네.” 내가 말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선 바지도 햇볕에 금방 마르니까.”

 

해 질 무렵, 그는 나를 마레마그눔 쪽 데크로 데려갔다. 물 위로 길이 나 있고, 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나무 데크의 결이 발바닥을 살짝 간질였다. 그는 두 손을 난간에 얹고 물결을 바라보다가, 내쪽으로 몸을 반 박자 기울였다. “내일 새벽에 잠깐 티비다보 올라갈래요? 도시가 깨어나기 직전, 그때가 제일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 대신 어깨가 먼저 움직였다.

 

셋째 날 새벽, 택시가 언덕을 굽이돌며 올랐다. 티비다보 전망에서 보는 바르셀로나는 거대한 파스텔이었다. 색이 아직 뜨겁지 않은 시간, 숨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바삭한 파스텔을 건넸다. 설탕이 손가락에 묻었고, 우리는 서로의 손끝을 힐끔거렸다가 동시에 웃었다. “이건 어느 도시에서나 통하는 인사.” 그가 말했다. 설탕이 바람에 조금 흩어졌다. 태양이 지붕 위로 올라오기 직전, 우리가 함께 보던 도시는 등줄기에서 서서히 따뜻해졌다.

 

내려오는 길에 그라시아의 작은 광장에 들렀다. 벤치마다 각자의 아침이 앉아 있었다. 신문, 강아지, 커피, 그리고 아이들의 목소리. 우리는 간단한 토르티야와 까눌레를 나눠 먹고, 멍하니 광장을 보았다. 이름을 제대로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 사소한 장면에 기대 쉬는 시간. 마르크가 물었다. “돌아가고 나면, 여기의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를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빛일까, 바르셀로네타 해변의 물기일까, 엘 보른의 오후 바람일까. 결국 나는 말했다. “지울 수 없이 가까워졌다가, 거리를 회복하는 순간들.” 그는 잠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는 제대로 보고 간 거야.”

 

마지막 저녁, 우리는 보른 문화센터 뒤편의 조용한 바에서 다시 버무트를 마셨다. 잔 속의 얼음이 작은 소리를 냈다. “내일은 바르셀로나가 나 없이도 잘 굴러가겠지.” 내가 말하자, 그는 웃었다. “도시는 늘 그래. 하지만 어떤 사람은, 떠나고 나서야 도시가 더 반짝이기도 해.” 우리는 서로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 소리는 약속이라기보다, 지금을 또렷하게 만드는 의식 같았다.

 

공항으로 가는 마지막 아침, 나는 혼자 콜롬부스 기념탑 근처를 걸었다. 차양 아래에서 생선이 반짝였고, 바닷새들이 낮은 선을 그렸다. 가방 어깨끈을 고치다가, 전날 마르크가 건넨 종이 조각을 다시 펼쳤다. 작게 그려진 화살표와 “Hasta luego(곧 다시 보자)”라는 글씨. 주소도, 날짜도 없다. 하지만 방향은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 빛이 묻는 쪽, 사람과 사람이 한 박자 기울어지는 쪽.

 

택시 창밖으로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첨탑이 다시 스쳤다. 아직 끝나지 않은 도시, 그래서 더 살아 있는 도시. 이번 여행에서 내가 배운 건 거창하지 않았다. 적당히 길을 잃는 법, 모서리에서 잠깐 멈추는 법, 그리고 누군가와 같은 풍경을 보다가 말없이 웃는 법. 현지인과의 로맨스는 번개처럼 시작해 여운처럼 남았다. 이름이 정리되기 전에 손바닥의 온기가 먼저 사라졌고, 그 사라짐이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공항 게이트 앞, 나는 속으로 도시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바르셀로나. 입안에서 굴리는 동안, 나는 이미 다음에 올 나의 보폭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 도시가 알려 준 속도로—너무 서두르지 않고, 그렇다고 늦지도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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