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문이 열리자 차가운 금속 냄새와 젖은 나무 냄새가 동시에 올라왔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에서 S반을 타고 오스트크로이츠 역으로 향하는 동안, 유리 천장에 스치는 빗방울과 선로를 달리는 철의 울림이 박자처럼 반복됐다. 나는 원래 이번 여행에서 미래 계획을 정리해 오겠다고 마음먹었었다. 퇴사와 대학원, 도시 이동, 프로젝트의 방향 같은 단어들이 노트 첫 장을 이미 무겁게 눌렀다. 그런데 창밖으로 흘러가는 침대 시트 같은 구름과 창틀의 물자국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 계획표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입구에서 느끼는 그 느슨함이, 이번엔 내게 필요한 첫 인사일지도 몰랐다.
첫날 저녁, 오버바움 다리를 걸어 스프레 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걸었다. 벽화가 깔린 긴 벽이 강과 나란히 뻗어 있었고, 사람들은 비에 젖은 페인트를 사진으로 끊임없이 떼어 갔다. 나는 휴대폰 메모장에 저장해 둔 사직서 초안을 다시 열어 보았다. 문장은 단정했지만 숨이 거칠었다. 한 문장 삭제, 한 문장 보류. 강바람이 불 때마다 문장들이 약간씩 뒤집혔다. 예전이라면 결정을 밀어붙였겠지만, 벽 앞에 서자 고민에 색을 입히는 쪽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계가 있기에 그림이 가능하다는 것. 경계가 있어도, 혹은 경계가 있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는 것.
둘째 날 아침, 템펠호퍼 펠트로 갔다. 옛 공항 활주로가 시민들의 운동장이 된 넓은 들판에서는, 자전거가 흰 활주로 선을 따라 미끄러지고, 커다란 카이트가 바람을 문장처럼 끌어당겼다. ‘미래’라는 단어가 갑자기 활주로의 숫자처럼 구체적으로 보였다. 내게 필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라 시험 비행이었다. 30일, 90일, 한 시즌 정도의 길이로, 한 가지씩 크게 돌려보는 실험. 사람과 일을, 도시와 생활 리듬을, 장비와 몸을. ‘어떤 삶을 영원히’가 아니라 ‘어떤 시도를 언제까지’라는 문법으로. 들판 한가운데 서서 바람을 맞으니, ‘결정’의 무게가 ‘연습’의 길이로 환산되었다.
점심 전, 노이쾰른의 작은 빵집에 들어갔다. 기름기 적은 버터브뢰첼과 뜨거운 필터커피. 계산대 옆에는 빈 병을 돌려주면 받는 판트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사소하지만 단단한 시스템들이 이 도시의 자존심을 구성하고 있었다.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젊은 직원이 내 발음이 어설픈 ‘모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여긴 ‘글라이히’가 많아요. 곧, 금방, 바로. 그런데 그 ‘곧’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죠.” 나는 그 말을 적어 두었다. 미래에 대해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건 ‘정확히 언제’였다. 그런데 ‘곧’이라는 유연한 시간은 사람을 조금 덜 긴장하게 했다. 아직이지만 이미 시작된 상태. 그게 미래가 도시에서 살아 움직이는 방식인지도 몰랐다.
오후에는 박물관 섬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건축물 몇 곳은 공사 가림막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고, 열린 전시관에서는 조각의 균열이 그대로 빛을 받았다. 완벽하지 않은 채로 공개된 것들. 나는 유리 케이스 너머 금속의 산화 자국에 오래 시선을 뒀다. 불완전함을 덮는 대신 관리하고 보여주는 태도는, 미래를 상대하는 좋은 예의처럼 느껴졌다. ‘완벽해지면 시작하자’는 말은 아주 오랫동안 내 발을 묶어 둔 주문이었다. 이곳의 유리 케이스들은 조용히 반박했다. ‘시작한 다음 완벽에 가까워지면 된다.’
해 질 무렵, 크로이츠베르크의 운하변 벤치에 앉았다. 물 위로 비친 가로등이 바람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자전거 벨 소리와 개를 부르는 휘파람, 슈퍼에서 나온 누군가의 비닐봉지 부딪히는 소리. 나는 노트를 펴고 미래를 ‘일’이 아니라 ‘시간’으로 다시 나눠 적었다. 아침 시간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점심 이후의 기복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 저녁의 느슨함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직함과 연봉 대신 시간의 배열로 계획을 짜자, 내가 원하는 삶의 모양이 훨씬 또렷해졌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직업군이 아니라 하루의 리듬 쪽이라는 걸, 물결이 가르쳐 주고 있었다.
일요일, 마우어파크 벼룩시장이 열렸다. 오래된 카메라와 낡은 재킷, 이름 모를 배지와 탁자들이 햇빛 속에 펼쳐졌다. 잔디밭에는 버스킹 무대가 생겼고, 사람들은 번갈아 올라가 노래를 불렀다. 음정이 자주 미끄러졌고, 박자가 어긋나는 순간도 많았다. 그럼에도 박수는 넉넉했다. 실패를 즐겁게 관객 앞에서 연습하는 도시.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보았다. 나의 계획이 막히는 지점은 늘 ‘처음’이었다. 첫 번째 영상, 첫 번째 강연, 첫 번째 제품. 이 도시의 일요일은 말해 주고 있었다. 처음은 구경당해도 괜찮고, 서툴러도 환영받는다고. 그래서 두 번째가 가능해진다고.
저녁엔 프리드리히샤인 쪽의 작은 극장에서 실험적인 공연을 봤다. 무대 위 배우들은 대사를 완벽히 외우기보다 서로의 숨을 맞추는 데 집중했다. 미리 짜여진 결말 대신 주어진 제약 안에서 즉흥을 쌓아 올렸다. 객석의 관객들은 조용했고, 마지막 장면에서만 크게 웃었다. 극장을 나와 밤 공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내 앞의 고민들도 아마 결말로 풀 문제가 아니라 제약과 즉흥의 비율로 풀 문제일 것이다. 돈, 시간, 관계, 체력이라는 제약 안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즉흥의 폭을 늘리는 일. 그 폭이 넓어질수록 미래는 덜 무서울 테니까.
네 번째 날, 나는 전철을 타고 반시계 방향으로 링을 반 바퀴 돌았다. 창밖에 반복되는 플랫폼 이름들이 리듬처럼 이어졌다. 어느 역에서는 노란 재킷을 입은 교통 안내원이 어린아이를 안심시키며 손을 흔들었다. 도시가 사람의 하루를 도와주는 방식은 생각보다 자주 보였다. 길바닥의 자잘한 경사, 신호등 대기 시간, 벤치의 간격 같은 것들. 미래를 바꾸는 건 위대한 결심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작은 편의의 합일지도 모르겠다고, 기차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말했다.
점심으로 카레부어스트를 먹고 나오는 길, 비가 잠깐 내렸다. 비를 피하려 들어간 슈패티 앞에서, 주인아저씨가 챙겨 준 작은 우비가 의외로 멋있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동전 몇 개를 더 얹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여행자에게 필요한 건 지도보다 비닐이야. 오늘을 건너게 해 주거든.” 오늘을 건너는 기술, 그것이 쌓여 미래가 된다는 말 같았다. 우비를 벗고 나니 비가 멎었고, 도시는 다시 맑은 색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전날 밤, 친구의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작은 스튜디오에서 야간 포스터 워크숍에 참여했다. 열 명이 같은 주제로 각자의 글자를 만들었다. 같은 잉크, 같은 롤러, 같은 종이. 그런데 결과는 모두 달랐다. 내 포스터는 처음의 의도에서 조금 비켜났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완성 후 마시는 맥주가 유난히 부드러웠다. 누군가 내 포스터를 보며 말했다. “약간 흔들린 선이 더 오래 보이네.” 그 말이 칭찬처럼 꽂혔다. 내 미래도 아마 그런 모양이면 좋겠다. 조금 흔들리지만 오래 보고 싶은 선.
떠나는 날 아침, 오스트반호프 플랫폼에서 트렁크 손잡이를 쥐었다 풀었다 하며 기차를 기다렸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 사이로 커피 향이 지나가고, 멀리서 자전거 벨 소리가 얇게 섞여 왔다. 나는 노트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퇴사한다, 혹은 남는다 같은 문장을 당장 쓰지 않겠다. 대신 90일짜리 실험을 세 가지 시작한다. 아침 한 시간 쓰기, 점심 20분 걷기, 저녁 두 번의 만남 줄이기. 그리고 한 도시에서 배운 속도를 다른 도시에서도 시험해 본다. 미래는 결론이 아니라 루틴의 누적이다. 루틴은 장엄하지 않지만, 사람을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커졌다. 플랫폼 바깥으로 비가 다시 시작됐다. 나는 우비를 가방에서 꺼내다 말고 그대로 접어 넣었다. 오늘은 젖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 도시에서 내가 배운 건 단순했다. 결정을 미루는 대신 시작을 당겨라. 완벽을 기다리는 대신 공개하라. 미래를 묻는 대신 오늘의 리듬을 고쳐라. 그렇게 며칠을 살았더니, 어느새 마음속 계획표가 두꺼운 약속의 문서가 아니라, 얇고 유연한 비닐처럼 바뀌어 있었다. 필요할 때 꺼내 쓰고, 바람이 바뀌면 모양을 고쳐 잡는 것. 나는 그 비닐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베를린의 속도로,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다음 역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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